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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누비기

죽었다 살아나는 섬을 아는가?

 

<옴팡지게 쏟아집니다. 이놈의 장맛비! ‘후두둑’하고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백수 마음을 처연하게 만듭니다. 달력을 보니 세계여행을 끝내고 한국 들어온 지 딱 석 달이 되는 날입니다. ‘세계일주증후군’의 여파로 무직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저로선 마땅히 할 일이 없습니다.

빗줄기가 굵어집니다. 막걸리와 파전 생각이 간절하건만, 그냥 ‘오징어짬뽕’ 한 봉지를 집어 듭니다. 영양실조 걸린 제 지갑 녀석의 사정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 울적하여라.

이럴 땐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야 합니다. 정신 건강을 위해 그리해야 합니다. 서둘러 제 보물 상자를 열었습니다. 5대양 6대주가 오롯하게 담겨 있습니다. 구석에서 일기장을 꺼내듭니다. 1년 여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탓에 꼬질꼬질하기가 ‘거지발싸개’ 수준입니다. 외양이야 어떻든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청년백수의 기를 살려주기에 충분합니다.

일기장에서 몇몇 글들을 발견합니다. 분명 직접 쓴 글이건만 낯섭니다. 여행 중 다니던 신문사에 연재를 했더랬습니다. 아마도 그때 발탁한 ‘주연’들 말고도 ‘보조출연자’들이 여럿 있었나 봅니다. 알아보기 힘들게 휘갈긴 걸로 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단상들을 끼적여 놓은 듯합니다. 뒤늦게야 그들을 챙깁니다.>



 

죽었다 살기를 반복하는 섬이 있다. 산토리니다.

그리스의 수십 개 섬 가운데 여행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섬은 단연 산토리니. 백설기를 썰어놓은 듯 하얀 집은 저마다 옥빛 창문으로 멋을 내고서 지중해를 굽어본다. 마을 어귀마다 풍차가 돌고, 그 바람을 맞으며 살랑대는 빨래더미가 정겹다. 청정한 바다 위에 내려앉은 햇볕 조각이 파도에 반짝이고, 갈매기는 연신 자맥질을 한다. 보고 또 봐도 약비나지 않을 장면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섬을 찾아 매년 여름이면 수만의 인파가 산토리니로 몰려든다. 예약하지 않으면 숙소 잡기는 불가능하다. 식당과 상점, 기념품 가게 종사자들은 넘쳐나는 손님 덕에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그리스 본토와 섬을 오가는 페리가 하루에 십 수번 고동소리를 낸다. 생동감이 넘친다. 섬은 살아있다.

애석하게도 섬의 생명력은 짧다. 석 달 남짓한 성수기가 지나고 날이 선선해지면 섬 전체에 쩌렁하게 울려 퍼지던 뱃고동 소리가 줄기 시작한다. 섬의 심장박동도 함께 멎어간다. 그러다 겨울이 오면 산토리니는 죽은 섬이 된다.

나는 동장군이 기세를 떨치던 2월의 어느 날 산토리니에 도착했다. 휑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옳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테네에서 산토리니 행을 결정했을 때 많은 이들이 만류했다. 숙소 리셉션의 청년은 하루도 못돼 후회할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의 말이 옳았다. 벌써부터 후회가 밀려든다. 숙소를 찾는 일부터 꼬였다. 관광업 종사자가 대부분인 까닭에 산토리니 주민들은 비수기에 섬을 떠나곤 한다. 많은 수의 숙소가 문을 걸어 잠그거나, ‘수리 중’이란  푯말을 내걸고 있었다.

한참 동안 발품을 팔고서야 방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 시장기가 돌았다. 끼닐 때울 요량으로 식당을 찾아 나섰다. 여기서 또 일은 꼬인다. 도대체 문을 연 식당이 없다. ‘주인 사정으로 장기간 영업을 중지한다’는 안내문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공복감에다 피로까지 겹쳐 발걸음이 물먹은 솜 마냥 무겁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빵집이 보였다.

나흘째, 나는 12끼 째 빵을 먹고 있다. 퍽퍽한 밀가루 덩어리를 씹으며, 앞으로 평생 빵을 먹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지난 사흘 동안 내가 한 것이라곤 끼니 때 맞춰 빵을 사먹고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린 게 전부다. 그 마저도 비를 동반한 강풍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관광객은 물론이고 주민들은 다들 자취를 감췄다. 비수기 페리 운행 감축과 궂은 날씨로 언제 배가 뜰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죽은 섬에 고립됐다.

해질녘 둔덕에 올랐다. 섬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을 만큼 높은 지대다. 황혼 무렵 섬의 자태는 형용하기 힘들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언젠간 이 섬에도 다시 뱃고동이 울리겠지. 꽃 피는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와 섬이 살아나거든 그 때 다시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