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구별 누비기

숙소 예약 않고 뉴욕 갔다가 낭패한 경험

"빈 방 없습니다."

몇 시간째 같은 대답이다. 해는 빌딩숲 끝자락에 위태롭게 걸쳐있다. 곧 어둠이 밀려들 태세다. 큰일이다. 뉴욕 도심 한복판에서 노숙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밤이면 강력범죄가 잦은 대도시인지라 불안감이 컸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지만 헛수고다. 기력을 다했는지 더는 한 발도 뗄 수가 없다. 체면이고 뭐고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뿐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라던가. 이날만은 태산도 하늘도 뉴욕의 마천루보다 낮아보였다.

예약 없이 무작정 갔다가 진땀 '혹시 이러다 노숙하면 어쩌지?

미국의 상징, 자유의 여신상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하루 전 서부여행을 마치고 부모님은 한국행 비행기를, 나는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정오께 뉴욕에 도착했다. 몇몇 숙소에 들렀지만 방이 없단다. 이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반나절이 지나고 짙게 어둠이 깔린 후에야 가련한 여행자는 상황이 심각함을 깨닫는다.

뉴욕엔 둘러볼 곳이 많은 까닭에 성수기와 비수기의 경계가 없다.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을 비롯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브로드웨이, 월스트리트, UN본부, 타임스퀘어, 할렘, 록펠러 센터, 센트럴파크, 소호 등 익숙한 지명을 찾아 연중 관광객이 몰린다.

가까스로 숙소 잡고 맨해튼 활보 '세계 최고도시다운 기품이 있군'

미국 건국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보스턴. '자유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미국 독립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의 무덤이 있다.


따라서 숙소 예약은 필수다. 일정이 유동적인 탓에 미리 숙소를 정하기 힘든 장기여행자의 약점이 이곳 뉴욕에선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보다, 하루 종일 걸어 불어터진 발의 물집보다 힘겨운 건 사람들의 시선이다. 세련미와 고상함에 관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뉴요커(New Yorker). 이들의 흘끔거림은 여행자의 초라한 행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죽으란 법은 없나보다. 자정께 시 외곽의 숙소에서 빈 방을 찾았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언제나 극단적인 가격을 낳는 법. 맙소사! 4명이 혼숙하는 허름한 방이 우리 돈 9만 원이라니….

뉴욕의 비싼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던 터라 울며 겨자 먹기로 지친 몸을 뉘었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이라크뿐 아니라 미국의 젊은이들 역시 희생을 치렀다. 이라크 전쟁에서 숨진 이들의 군번줄이 빼곡하다.


파김치가 된 몸을 추스르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날 오후가 돼서야 겨우 숙소를 나서 시 여기저기를 둘러볼 수 있었다.

뉴욕시는 맨해튼·브롱크스·브루클린·퀸스·스태튼섬의 5개구로 이루어져 있다. 흔히들 뉴욕하면 떠올리는 대부분의 이미지는 시의 중심지인 맨해튼에 몰려있다.

세계 뮤지컬의 성지인 브로드웨이, 세계 증시를 뒤흔드는 월스트리트, 수십 년 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군림했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세계 최대의 도심 속 공원인 센트럴파크 등 세계 '최대' 혹은 '최고'란 훈장을 단 명소가 맨해튼에 즐비해 있다.

뉴욕 맨해튼의 마천루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처한 상황이 변하니, 끔찍하던 뉴욕 시가 달리 보인다. 죽순처럼 빼곡한 건물과 그 사이를 바삐 걷는 인파가 활기차다. 지구촌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답게 도시 구석구석에선 기품이 묻어난다.

브로드웨이의 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잔을 주문했다. 해가 마천루에 걸쳐있다. 곧 땅거미가 내려앉을 모양이다. 어제 이맘때를 생각하면 지금 주어진 여유가 눈물 나도록 소중하다. 야누스의 얼굴을 한 뉴욕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 지배자의 폭압에 항거해 독립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지닌 영국을 제압하고 독립을 이룬다. 사진은 당시 큰 공을 세운 미국 측 군함.